
'빠른 협상'이라는 미끼와 현실
트럼프 행정부는 취임 직후부터 '빠른 협상'이 유리하다며 일본과의 대화를 서둘렀습니다. "선점효과"를 강조하며 일본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고, 이후 "큰 진전(Big Progress)"이 있었다는 홍보를 대대적으로 펼쳤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했을까요? 일본은 오히려 난감한 상황에 처했으며, 무엇보다 '먼저 협상'해서 얻은 실익이 전혀 없었습니다. 75분간 진행된 회의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50분 동안 직접 참여하며 예상치 못한 방위비 이슈를 꺼내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 측은 긴급 대책회의까지 소집해야 했습니다. 애초에 '무역과 투자'에만 초점을 맞추기로 했던 협상이 갑자기 방위비 분담금으로 넘어가더니, 베센트 재무장관은 환율 문제까지 테이블에 올렸습니다. 일본 측 협상단은 "환율은 테이블에 등장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지만, 베센트 장관은 분명히 환율 문제를 다음 협상에서 논의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미일 무역 관계에서 핵심 이슈인 일본산 자동차와 철강, 알루미늄에 부과된 25% 관세를 낮추는 문제도 미국산 LNG 수입을 50억 달러에서 80억 달러로 대폭 늘리고, 미국 농산물 수입을 대폭 확대하는 조건이 붙었습니다. 현재 글로벌 무역 환경에서 이런 일방적인 요구는 WTO 규범에도 어긋나는 것으로, 국제 사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2025년 세계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일방적인 무역 압박은 글로벌 경기 침체를 더욱 가속화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환율 조작과 방위비 압박의 연계 전략
트럼프 행정부의 협상 전략 중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환율과 방위비를 연계한 압박입니다. 베센트 재무장관은 명시적으로 환율 정책 조정을 요구했으며, 이는 과거 플라자 합의를 연상시키는 강도 높은 압박입니다. 특히 달러당 130엔이라는 구체적인 환율 목표까지 제시하며, 이를 관세 완화와 연계시키는 전략을 펼치고 있습니다. 현재 환율 수준에서 130엔으로 조정될 경우, 엔화 가치가 약 13% 상승하게 됩니다. 이는 일본의 수출 경쟁력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는 수치입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과도한 환율 조정은 일본 경제에 심각한 부담"이라고 강조하며, 130엔 수준은 거의 '국난'에 해당하는 위기라고까지 표현했습니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는 일본은행(BOJ)에 엔화를 매수하고 달러를 매도하는 적극적인 시장 개입을 요구하고 있으며, 미 재무부는 기준금리 인상을 통한 엔화 강세를 유도하라고 압박하고 있습니다. 현재 글로벌 금융시장은 미 연준의 금리 인하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에게만 금리 인상을 요구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움직임입니다.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보면 일본(1.8%)이 미국(1.6%)보다 높은 상황에서, 금리 정책 개입은 일본의 성장 모멘텀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방위비 문제에서도 트럼프는 일본의 방위비를 GDP 대비 3% 수준으로 인상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는 현재 수준의 약 2배에 해당하는 16조 엔에 이릅니다. 과도한 방위비 증액은 일본의 재정 부담을 가중시키고, 사회 안전망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습니다.
미일 경제 관계의 새로운 국면과 전망
이번 협상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요소는 일본의 미국 국채 매입과 관련된 갈등입니다. 그동안 일본은 미국의 재정적자 완화에 상당한 기여를 해왔습니다만, 최근 일본 민간 영역에서 미국 국채를 대규모로 매도한 것이 트럼프 행정부의 신경을 건드린 것으로 보입니다. 2025년 1분기에만 약 200억 달러 규모의 미 국채가 매각되었는데, 이는 2024년 4분기(50억 달러) 대비 4배 증가한 수치입니다. 미 재무부는 일본 정부가 민간 부문의 국채 매각을 방관하는 것을 "의도적인 전략"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엔화 강세와 국채 매입을 관세 완화와 연계시키며 일본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관세 조치로 인한 경제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1인당 4.5만 엔의 현금 지급을 고려하고 있으며, 기업에 대한 추가 지원금도 검토 중입니다. 이시바 시게루 총리는 "과도한 타협은 피해야 한다"며 협상에서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사실상 트럼프가 말한 "Big Progress"는 미국이 관세, 방위비, 환율로 일본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미국 입장에서만 진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오징어 게임'의 유리다리에서 첫 번째 순서를 뽑은 참가자처럼, 선점효과가 오히려 불리하게 작용한 사례입니다. 세계 무역 질서가 혼란스러운 현 시점에서 한국을 포함한 다른 무역국들은 일본의 사례를 면밀히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서두르는 협상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내주게 되는 함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향후 트럼프 행정부가 다른 동맹국들과의 협상에서도 이러한 전략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은 만큼, 냉철한 대응 전략 수립이 필요한 시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