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리스틱과 편향의 함정
우리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점수'를 매깁니다. 사람, 물건, 경험 등 모든 것에 대해 자연스럽게 평가를 내리고 있지요. 대니얼 카너먼이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설명한 '점수 매기기'는 인간의 판단 과정에서 발생하는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우리의 뇌는 복잡한 문제를 단순화하여 점수로 환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빠른 판단을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심각한 인지적 오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의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의 능력, 성격, 신뢰성 등을 판단하고 이후 모든 정보를 그 판단에 맞춰 해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휴리스틱은 효율적이지만, 종종 현실과 동떨어진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카너먼은 이 과정에서 작동하는 '시스템 1'과 '시스템 2'라는 두 가지 사고 방식을 구분합니다. 시스템 1은 빠르고, 자동적이며, 감정적이고 고정관념에 의존하는 사고 방식입니다. 반면 시스템 2는 느리고, 의식적이며,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사고 방식입니다. 점수 매기기는 주로 시스템 1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동적으로 발생합니다. 예컨대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인테리어만 보고 음식의 질을 예측하거나, 면접자의 외모나 말투만으로 업무 능력을 판단하는 것이 이에 해당합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초기 평가가 이후의 모든 정보 해석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처음에 좋은 인상을 받은 사람의 실수는 '예외적인 상황'으로 너그럽게 해석하고, 나쁜 인상을 받은 사람의 성공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폄하하게 됩니다. 이처럼 점수 매기기는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과 결합하여 우리의 판단을 왜곡시킵니다. 특히 전문가들조차 이러한 함정에 빠지기 쉬운데, 자신의 전문성에 대한 과신이 오히려 객관적 판단을 방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 질문의 위험성
카너먼이 특히 강조하는 점은 '점수 매기기'가 종종 '대체 질문'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어려운 질문을 마주했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질문을 더 쉬운 질문으로 대체하여 답을 찾곤 합니다. 예컨대 "이 후보자가 좋은 대통령이 될까?"라는 복잡한 질문 대신 "이 후보자의 연설이 인상적인가?"라는 단순한 질문에 답함으로써 판단을 내립니다. 이러한 대체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심각한 왜곡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중요한 정보는 무시한 채, 쉽게 접근 가능한 정보에 과도한 가중치를 부여하게 됩니다. 이는 개인적 판단뿐만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의사결정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인지적 함정입니다.
이러한 대체 질문 현상은 우리 일상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식 투자를 할 때 "이 회사의 장기적 성장 가능성과 재무 건전성은 어떠한가?"라는 본질적 질문 대신, "최근 이 회사에 대한 뉴스는 긍정적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게 됩니다. 대학 입시에서도 "이 학생이 우리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중요한 질문 대신 "이 학생의 시험 점수와 스펙은 어떠한가?"라는 질문으로 대체됩니다. 카너먼은 이러한 현상을 'WYSIATI'(What You See Is All There Is,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여기는 경향)라고 명명했습니다. 우리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보만을 가지고 판단하며, 누락된 정보의 중요성은 간과합니다. 이는 특히 복잡한 사회 문제나 정책 결정에서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교육 개혁의 효과를 평가할 때 당장의 시험 점수 향상만을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환경 정책을 수립할 때 단기적인 경제적 비용만을 고려하는 식입니다. 이러한 대체 질문은 종종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자 하는 답과는 거리가 먼 결론으로 이끌게 됩니다.
인지적 성찰과 더 나은 선택을 위하여
'점수 매기기'의 함정을 인식하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을 위한 첫걸음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판단 과정을 의식적으로 검토하고, 어떤 휴리스틱이나 편향이 작용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는 직관적인 판단에만 의존하지 말고,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전문가들조차 자신의 분야에서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는 카너먼의 지적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판단에 대해 적절한 수준의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필요한 경우 판단을 유보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이러한 인지적 성찰은 단순히 더 나은 개인적 선택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집단적 의사결정과 사회 시스템의 개선을 위해서도 필수적입니다.
카너먼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간단하면서도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첫째, 자신의 직관적 판단을 의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정말로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무엇인가?", "내가 가진 정보는 충분한가?", "내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감정이나 선입견은 없는가?"와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아야 합니다. 둘째,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체크리스트나 알고리즘적 접근법을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직원을 채용할 때 미리 정해진 평가 기준에 따라 점수를 매기고, 이를 종합하여 판단하는 방식이 첫인상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셋째, 집단 지성을 활용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다양한 배경과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함으로써 개인적 편향을 상쇄할 수 있습니다. 넷째, '예측 기록'을 남기는 습관을 들이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자신이 과거에 내린 판단과 그 결과를 기록하고 검토함으로써, 자신의 판단 과정에서 반복되는 오류 패턴을 발견하고 개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카너먼과 그의 동료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러한 메타인지적 훈련을 통해 판단의 정확성을 상당히 높일 수 있다고 합니다. 결국 '점수 매기기'의 함정을 피하기 위한 핵심은 시스템 1의 자동적인 판단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는, 시스템 2의 의식적이고 분석적인 사고를 적절히 활용하는 균형 감각을 기르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