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이즈: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판단의 적
카너먼은 '정당성의 착각(Noise: A Flaw in Human Judgment)'에서 인간의 판단에 개입하는 '노이즈'라는 개념을 소개합니다. 노이즈란 같은 사안에 대해 다른 판단을 내리게 만드는 무작위적 변동성을 뜻합니다. 법원에서 같은 사건을 두고도 판사마다 형량이 크게 달라지거나, 의사들이 같은 X-레이 사진을 보고도 전혀 다른 진단을 내리는 현상이 바로 노이즈의 영향입니다. 우리는 편향(bias)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지만, 노이즈의 존재와 그 심각성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카너먼은 이 노이즈가 우리 사회의 주요 기관과 시스템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이로 인한 비용과 불평등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고 경고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우리가 전문가라고 믿어 왔던 사람들의 판단이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실험 결과들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같은 범죄에 대해 미국 판사들이 내리는 형량의 차이가 최대 수십 년까지 벌어진다는 사실은 사법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이러한 노이즈는 단순히 전문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인간 인지 시스템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해결하기 더욱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가 편향에 대해서는 자주 논의하고 수정하려 노력하는 반면, 노이즈는 그 무작위적 성격 때문에 식별하기도 어렵고 따라서 해결책 모색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시스템적 오류와 개인적 변동성
카너먼과 그의 공동 저자들은 노이즈의 다양한 원인을 분석합니다. 판단을 내리는 사람의 기분, 날씨, 최근 접한 정보, 심지어 점심 식사 여부까지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가령 한 연구에서는 판사들이 점심 식사 직전에 가장 엄격한 판결을 내렸고, 식사 직후에는 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러한 개인 내 노이즈(한 사람의 다른 시점 판단 차이)와 개인 간 노이즈(여러 사람 사이의 판단 차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게 존재합니다. 저자들은 전문가들조차 자신이 내리는 판단의 일관성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정당성의 착각'이 노이즈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고 주장합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현대 사회의 전문가 의존 시스템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합니다. 우리는 의사, 판사, 금융 분석가, 인사 담당자 등의 전문가들이 객관적이고 일관된 판단을 내릴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이들의 판단이 놀라울 정도로 가변적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자신의 판단이 얼마나 노이즈에 영향받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객관적이고 일관된 판단을 내린다'는 착각은 자기 성찰과 개선의 기회를 차단하는 위험한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비단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전문가 판단에 의존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합니다.
노이즈 감소를 위한 실천적 방안
카너먼은 노이즈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줄일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결정 위생(decision hygiene)'이라 불리는 이 접근법은 판단 과정을 여러 독립적인 단계로 나누고, 명확한 기준을 세우며, 각 단계의 판단을 독립적으로 수집한 후 통합하는 방식입니다. 또한 '알고리즘적 의사결정'의 가치를 강조하는데, 많은 연구에서 단순한 알고리즘조차 전문가보다 더 일관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인간의 판단을 완전히 대체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인간과 알고리즘의 장점을 결합하여 더 나은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제안입니다. 카너먼의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주요 기관들이 노이즈 문제를 인식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할 때, 더 공정하고 효율적인 사회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실천적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 판단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를 보완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단순히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와 직결됩니다. 예를 들어, 형사 사법 시스템에서 노이즈를 줄이는 것은 같은 범죄에 대해 다른 처벌을 받는 불공정을 줄이는 것이며, 의료 시스템에서 노이즈를 줄이는 것은 잘못된 진단으로 인한 고통과 비용을 줄이는 일입니다. 특히 최근 AI와 빅데이터 기술의 발전은 알고리즘적 의사결정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습니다. 다만 알고리즘이 인간의 편향을 그대로 학습할 수 있다는 위험성도 고려해야 하며, 결국 인간과 알고리즘의 최적의 조합을 찾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