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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LNG선 세계 표준을 바꾸다

by Factory Boss 2025. 9. 26.

‘모두가 미쳤다고 한’ 초저온 운반선 시장의 전략적 도전

LNG 운반선은 단순히 커다란 배를 만드는 것을 넘어, 영하 163도라는 극한의 온도를 다루는 초고난도 기술의 집약체입니다. 과거 미국에서 초저온 탱크의 취성 파괴로 인해 대형 화재 참사가 발생했을 만큼, 이 화물의 안전한 운송은 극도로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1960년대 말, 일본이 이 LNG 생태계를 처음 구축하며 프랑스와 노르웨이의 기술을 도입해 시장을 선점했고, 특히 공 모양의 탱크를 선체 위에 얹는 모스(Moss) 방식이 세계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방식은 안전성이 높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구형 탱크로 인해 선체 내부에 빈 공간이 생겨 운송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은 1980년대 후반, 이 LNG 운반선 시장에 후발 주자로 뛰어들었습니다. 주목할 점은 당시 한국 조선업체들이 LNG선 건조 실적이 전무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한국가스공사가 국가 전략 차원에서 국내 업체에 발주를 강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당장의 수익보다는 미래의 기술 독립과 시장 선점을 내다본 용단이었습니다. 일본이 업체 간 일감을 나눠주는 카르텔 방식(조직)으로 시장을 운영한 것과 달리, 한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한 경쟁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이 경쟁 속에서 현대중공업은 모스 방식 라이선스를 확보했지만, 대우조선과 한진중공업은 공간 활용도가 뛰어난 프랑스 멤브레인(Membrane) 방식이라는 비주류 기술을 선택해 연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멤브레인 방식은 선체 내부 공간을 꽉 채워 더 많은 화물을 실을 수 있었고, 이는 곧 운송 원가를 절감하는 효과로 이어져 선주들의 폭발적인 선택을 받았습니다. 현재 전 세계 LNG 운반선의 84% 이상이 이 멤브레인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한국이 기술을 주류로 끌어올리며 시장의 표준 자체를 바꿔낸 최초의 혁신 사례입니다. 이 단 하나의 전략적 결정이 오늘날 1,000억 달러가 넘는 시장을 한국에 가져다준 초석이 된 것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원가 파괴와 추진 시스템의 대전환

1990년대 말, 동아시아 외환위기(IMF 사태)로 인해 LNG 수요가 급감하고 공급이 과잉되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국제 시장은 운송비를 절감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한국 조선업계는 이를 역이용해 일본의 시장 지배력을 꺾는 두 번째 혁신을 감행했습니다. 당시 척당 3억 달러에 육박하던 선박 가격을 2억 달러 이하로 낮추는 ‘원가 파괴’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의 핵심은 환율 효과를 극대화하고, 동시에 무모할 정도의 배짱과 선제적인 대규모 계약이었습니다. 한국 업체들은 '앞으로 우리가 50척 이상의 LNG선을 건조할 테니, 핵심 기자재를 우리에게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해 달라'는 독점 계약을 해외 부품 공급사들에 제안했습니다. 핀란드의 특수 합판 제작 업체나 일본의 스팀 터빈 제작사(가와사키) 같은 곳들은 한국의 과감한 제안에 결국 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환율 이익에 독점 계약을 더해 일본보다 훨씬 낮은 가격을 제시하면서도, 20% 이상의 영업 이익을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화물창 반제품 공장을 아예 조선소 옆에 세워버리는 수직 통합을 추진하며, 기술 내재화와 원가 절감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이어 2000년대 초반, 미국이 세계 최대 LNG 수입국으로 떠오르고 카타르-미국을 잇는 장거리 항로가 중요해지자, 세 번째 혁신이 필요해졌습니다. 기존 스팀 터빈 방식은 에너지 효율이 30% 미만으로 낮아, 긴 항해 중 발생하는 기화 가스(Boil-Off Gas)만으로는 동력에 한계가 있었고, 비효율적으로 화물을 태워야 했습니다. 이에 한국 조선소, 특히 삼성중공업을 중심으로 크루즈선에서 검증된 고효율 DFDE (Dual Fuel Diesel Electric) 추진 시스템을 LNG선에 도입했습니다. 이는 기화 가스를 효율 40% 이상의 발전기 엔진으로 돌려 전기를 만들고, 이 전기로 선박을 운항하는 방식입니다. 이 기술은 운항비를 20~30%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한국 업체들은 이미 잘 팔고 있는 기존의 스팀 터빈 기술을 과감히 버리고 이 새로운 기술을 채택함으로써 다시 한번 글로벌 선주들의 선택을 독점하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기술적 성공을 이끈 한국 특유의 '우리가 하자' 공동체 정신

한국 LNG선 성공 신화의 배경에는 단순히 뛰어난 기술력이나 절묘한 타이밍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이미 성공한 기술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표준을 향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한 한국 조선업 특유의 문화입니다. 일본이 정부의 관리 하에 안정을 추구하며 기존 방식을 고수할 때, 한국은 업체 간의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서로를 뛰어넘게 만들었습니다. 현대가 모스 기술을 선점하자 대우는 멤브레인을 들고 나왔고, 다시 대우가 멤브레인으로 재미를 보자 삼성은 더 진보한 DFDE 추진 시스템을 들고나와 경쟁사를 이끌었습니다.

 

이러한 혁신들은 현장 엔지니어들의 확고한 신념과 “우짜겠노, 해야지”라는 도전 정신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당시 현장의 실무자들은 외국에서 수입하는 기자재가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고, 기술을 내재화하고 원가를 파괴하면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때로는 경영진의 승인 없이, 때로는 회사의 사활을 건 무모한 배짱으로 계약을 밀어붙였던 일화는 한국 LNG선 신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회장님 연락이 안 돼서’ 일을 진행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얼마나 강한 현장 주도적 의지가 발휘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한국 LNG선 산업은 국가적인 전략적 비전, 기업 간의 건전하고 치열한 경쟁, 그리고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기술 표준을 향해 나아간 현장 엔지니어들의 집념이 만들어낸 합작품입니다. 그 결과, 전 세계를 누비는 750여 척의 LNG선 중 500척 이상을 대한민국 조선소가 건조하며 명실상부한 세계 LNG 운반선 시장의 지배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 성과를 넘어, 한국의 도전과 혁신 정신이 글로벌 산업의 지형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자랑스러운 기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