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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돈] 금융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밝히다 (케빈 필립스)

by Factory Boss 2025. 5. 18.

[나쁜 돈] 금융 자본주의의 그림자를 밝히다 (케빈 필립스)

금융화의 함정

케빈 필립스의 "나쁜 돈(Bad Money)"은 현대 금융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날카롭게 분석한 작품입니다. 저자는 미국 경제가 실물 경제에서 금융 경제로 중심이 이동하는 '금융화(financialization)' 현상을 심도 있게 파헤칩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금융 부문이 미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80년대 약 12%에서 2008년 금융위기 직전 21%까지 급증했다는 통계적 분석이었습니다. 필립스는 이러한 금융화가 단기적으로는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버블을 형성하고 경제의 취약성을 증가시킨다고 경고합니다. 또한 금융 엘리트와 정치 권력의 결탁을 통해 형성된 '금융 레짐(financial regime)'이 어떻게 규제 완화와 금융 혁신이라는 명목 하에 위험한 금융 상품을 확산시켰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줍니다.

저자는 금융화의 폐해를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분석합니다. 특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등 과거 세계 패권국들이 모두 실물 경제에서 금융 경제로 중심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몰락했다는 역사적 패턴을 지적하는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미국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필립스의 경고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습니다. 더불어 책에서는 금융화가 가져온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를 지적합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 엘리트들은 천문학적인 보너스를 받는 반면, 일반 시민들은 정체된 임금과 불안정한 일자리에 시달리는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특히 서브프라임 모기지와 같은 금융 상품이 어떻게 저소득층을 착취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금융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점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근본적인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한 비판으로 다가옵니다.

석유와 달러의 공생 관계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와 석유 산업의 밀접한 관계를 분석한 장입니다. 필립스는 '페트로달러(petrodollar)' 시스템이 어떻게 미국에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는지 설명합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가 금본위제를 폐지한 이후, 국제 석유 거래가 달러로 이루어지는 체제가 확립되면서 미국은 사실상 달러를 찍어내는 것만으로도 국제 금융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다시 미국 금융 시장에 투자하는 '재활용(recycling)' 메커니즘이 어떻게 미국 경제를 지탱해왔는지 상세히 분석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가 중국, 러시아 등 신흥 강대국의 부상과 대체 에너지원의 발전으로 점차 약화되고 있다는 지적은 미국 경제의 미래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특히 필립스는 석유 생산량이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하는 '피크 오일(peak oil)' 이론을 심도 있게 다루며, 이것이 글로벌 경제에 미칠 영향을 예측합니다. 에너지 비용 상승이 실물 경제에 미칠 타격과 동시에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가 약화될 경우 미국의 금융 패권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또한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들이 달러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펼치는 다양한 전략들, 예를 들어 자국 통화로 석유를 거래하는 시도나 금 보유량을 늘리는 정책 등이 앞으로 글로벌 금융 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한 논의도 흥미로웠습니다. 이러한 관점은 단순한 경제 분석을 넘어 지정학적 역학 관계까지 고려하는 필립스의 통찰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국이 군사력을 통해 페트로달러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시도와 중동 지역에서의 개입이 사실은 경제적 이해관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분석은 국제 정치의 이면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금융 시스템의 개혁 과제

마지막으로, 이 책은 금융 시스템의 근본적인 개혁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필립스는 2008년 금융위기가 단순한 사이클적 조정이 아닌, 미국 경제 모델의 구조적 결함을 드러낸 사건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는 위기 이후 취해진 조치들—대형 금융기관 구제, 초저금리 정책, 양적완화 등—이 오히려 근본 문제를 회피하고 더 큰 위기의 씨앗을 뿌리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특히 '대마불사(too big to fail)'라는 이름으로 대형 금융기관들에 제공된 암묵적 보증이 도덕적 해이를 조장하고 금융 시스템의 취약성을 더욱 증가시켰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해 보입니다. 저자는 금융 부문과 실물 경제 간의 건전한 균형을 회복하기 위해 금융 규제 강화, 투기적 활동에 대한 과세, 금융 시스템의 간소화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필립스는 단순한 금융 개혁을 넘어, 미국 경제 모델 자체의 재검토를 촉구합니다. 그는 지나친 소비와 부채에 의존한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 생산적인 투자와 혁신을 중심으로 한 경제로 전환할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해 에너지 인프라, 교육, 의료 등 핵심 분야에 대한 투자 확대와 함께 글로벌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금융 개혁이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의지의 문제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금융 엘리트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상황에서 진정한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시민들의 정치적 각성과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하는 대목은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필립스의 책은 단순한 경제 분석서를 넘어 민주주의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쁜 돈"은 출간된 지 십여 년이 지났지만, 그 통찰과 경고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금융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필립스의 분석은 오히려 더 큰 설득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전례 없는 규모의 통화 공급 확대와 자산 가격 버블, 그리고 심화되는 사회적 불평등은 그가 경고했던 문제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 책은 우리가 현재의 금융 시스템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보다 지속 가능하고 공정한 경제 모델을 향해 나아갈 필요성을 일깨워줍니다. 모든 경제 주체들, 특히 정책 결정자들과 금융 분야 종사자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